맨위로가기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4·19 혁명 이후 의원내각제 헌법에 따라 치러진 1960년 7월 29일의 선거이다. 민의원과 참의원을 선출하는 양원제로 실시되었으며, 선거권 연령이 만 20세로 낮아졌다. 선거 결과,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민의원에서는 175석, 참의원에서는 31석을 확보했다. 자유당은 몰락하여 소수의 의석만을 얻었고, 혁신계 정당들은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선거 후 민주당 내 신·구파 갈등으로 인해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나 내각 구성 과정에서 갈등이 지속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60년 대한민국의 선거 - 1960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치러진 1960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는 선거 제도 개혁과 민주당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의회 해산, 낮은 투표율, 그리고 5·16 군사정변으로 지방자치가 중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 1960년 대한민국의 선거 - 1960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1960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는 의원들의 사퇴 및 피살로 발생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1월 23일, 10월 10일, 12월 30일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자유당, 민주당, 한국사회당, 무소속 후보들이 당선되었고 일부 선거구는 결과 자료가 없다.
  • 1960년 7월 - 1960년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
    1960년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은 10회째를 기념하여 총 3경기로 치러졌으며,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의 퍼시픽 리그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센트럴 리그가 맞붙어 1, 3차전은 퍼시픽 리그, 2차전은 센트럴 리그가 승리했고, 오 사다하루의 첫 팬 투표 출전, 하리모토 이사오의 3차전 MVP 수상, 텔레비전 중계 사상 최초의 컬러 방송 등 다양한 화제를 낳았다.
  • 1960년 7월 - 1960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은 프랑스에서 개최되었으며, 소련이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이다.
  • 조기선거 -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2017년 5월 9일에 치러진 조기 대선으로, 문재인 후보가 41.1%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9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진보 진영 후보의 최대 득표율 차이 및 역대 대선 최대 득표 차이를 기록하며 한국 정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조기선거 - 2017년 영국 총선
    2017년 영국 총선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테리사 메이 총리의 조기 총선 결정으로 치러졌으며,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방식으로 진행되어 보수당이 제1당을 유지했으나 과반수 확보에 실패,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과 협력하여 소수 정부를 구성하고 브렉시트 협상 및 총리 리더십 논란, 젊은 유권자 투표율 변화 미반영, 러시아 선거 개입 의혹 등 여러 쟁점을 남겼다.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지도
1960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구별 결과
선거구별 결과
기본 정보
국가대한민국
이전 선거1958년
선거일1960년 6월 29일
다음 선거1963년
민의원 선거
선거 이름민의원
투표율84.35% ( 3.45%p)
선출 의석 수민의원 전체 233석
과반 의석 수117석
민의원 선거 결과
정당민주당
정당 지도자장면
득표율41.71%
이전 선거 의석 수79석
당선 의석 수175석
정당사회대중당
정당 지도자서상일
득표율5.96%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4석
정당자유당
정당 지도자조경규
득표율2.75%
이전 선거 의석 수126석
당선 의석 수2석
정당한국사회당
득표율0.64%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1석
정당통일당
득표율0.19%
이전 선거 의석 수0석
당선 의석 수1석
정당기타 정당
정당 지도자
득표율1.65%
이전 선거 의석 수0석
당선 의석 수1석
정당무소속
정당 지도자
득표율46.81%
이전 선거 의석 수27석
당선 의석 수49석
민의원 의장
선거 전 의장곽상훈
선거 전 의장 소속 정당민주당
선거 후 의장곽상훈
선거 후 의장 소속 정당민주당
참의원 선거
선거 이름참의원
선출 의석 수참의원 전체 58석
과반 의석 수30석
참의원 선거 결과
정당민주당
정당 지도자장면
득표율51.41%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31석
정당자유당
정당 지도자조경규
득표율6.12%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4석
정당사회대중당
정당 지도자서상일
득표율1.37%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1석
정당한국사회당
득표율1.27%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1석
정당기타
정당 지도자
득표율1.77%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1석
정당무소속
정당 지도자
득표율38.07%
이전 선거 의석 수신생
당선 의석 수20석

2. 배경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민의원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참의원은 1952년 7월 헌법 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실제 선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였다.

2. 1. 4.19 혁명과 개헌

4·19 혁명 이후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 헌법이 공포되었고, 10일 뒤인 6월 25일 개정·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7월 29일 민의원의원과 참의원의원의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10] 이 선거는 헌법을 개정하여 정부의 구성 방식을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변경한 후, 제2공화국을 담당할 정부를 선택하는 최초의 선거였기 때문에 국내·외의 관심을 받았다.[10]

양원제참의원1952년부터 헌법에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 기간에는 집권당인 자유당의 거부로 의원 선거 자체가 실시되지 못하고, 국회는 사실상 민의원 단독의 단원제로 운영되었다.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물러난 후,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로의 헌법 개정이 시행된 후, 민의원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참고로, 참의원은 이승만 시대인 1952년 7월 헌법 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고, 이번이 처음으로 치러지는 선거였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 모두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었다.

2. 2. 선거 제도

1952년부터 헌법에 양원제가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 기간에는 집권당인 자유당의 거부로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국회는 사실상 민의원 단독의 단원제로 운영되었다.[11]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제5대 총선에서 처음 실시된 참의원 선거는 서울특별시와 각 도(道)를 선거구로 한 대선거구제로 실시되었다. 참의원의 선거구별 의원 정수는 전라남도, 경상남도, 경상북도가 각 8명, 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가 각 6명, 강원도, 충청북도가 각 4명, 제주도는 2명이었다. 투표는 하나의 투표용지에 1명에게만 기표하는 단기명 투표가 아니라, 선거구별 당선 정원의 2분의 1까지 기표할 수 있는 제한 연기명 투표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예를 들어 한 선거구에서 6명의 참의원의원이 선출될 경우, 그 선거구의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기재된 후보자 중 3명까지 기표할 수 있었다.[11]

민의원의원 선거는 종전과 같이 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투표 방법은 먼저 민의원의원에 투표하고, 그 다음 참의원의원에 투표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었다.

이번 선거부터 선거권 연령이 만 21세에서 만 20세로 낮아졌다.

2. 3. 정당 상황

민주당은 집권당으로 확정적이었으나, 233개 선거구 가운데 민의원의원에 227명, 참의원의원에 58명을 공천하려 했다. 그러나 신파와 구파 간의 경쟁이 치열하여 신파 공천 선거구에 구파가, 구파 공천 선거구에 신파가 대항 후보를 내는 곳이 110여 곳이나 되었다.[1]

몰락하던 자유당은 공식적인 공천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자유당으로 출마한 사람은 민의원의원이 54명, 참의원의원이 11명이었다.[1]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민주당을 비롯하여 14개 정당·사회단체가 후보를 냈고, 무소속은 입후보자 총수의 64.4%에 해당하는 1,010명으로 4·19혁명 직후의 정치 과열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모두 305명이 입후보하여 전체의 19.55%를 차지했다.[1]

3. 선거 결과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된 후, 1960년 7월 29일에 민의원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참의원은 1952년 헌법 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실제 선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번 선거부터 선거권 연령이 만 21세에서 만 20세로 낮아졌다.
주요 정보


  •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 국무총리
  • 의석 수
  • 민의원: 233석
  • 참의원: 58석
  • 선거 제도
  • 민의원: 소선거구제
  • 참의원: 서울특별시와 도를 선거구 단위로 한 대선거구제(제한연기제)
  • 입후보자 수
  • 민의원: 1,563명
  • 참의원: 201명
  • 선거 인구: 11,593,432명
  • '''투표일''':1960년 7월 29일
  • '''투표율''':84.3%


자유당이 사실상 붕괴하고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군소정당이 난립하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였지만,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무소속 당선자 상당수는 민주당 후보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국회 개원과 동시에 민주당에 입당했다. 13개 선거구에서 부정이 적발되어 재선거가 실시되었지만, 대체로 자유롭고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진보당 사건 이후 잠잠했던 혁신 세력은 4·19 혁명 이후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을 결성하여 선거에 참여했지만, 준비 기간이 짧아 민의원 5석, 참의원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3. 1. 민의원 선거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중 민의원 선거는 자유당이 사실상 붕괴되고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여러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하지만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총 투표율은 84.3%였으며, 총 투표자 수는 9,778,921명이었다.

민주당은 총 175석을 획득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사회대중당은 4석, 자유당은 2석, 한국사회당은 1석, 통일당은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무소속 당선자는 49명이었으나,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인사들로, 국회 개원과 함께 대부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정당별 당선자 수

정당의원 수
민주당175석
사회대중당4석
자유당2석
한국사회당1석
통일당1석
헌정동지회1석
무소속49석
합계233석


지역별 당선자 수

지역민주당사회대중당자유당한국사회당통일당헌정동지회무소속합계
서울특별시15석-----1석16석
경기도14석-----11석25석
강원도11석1석1석---7석20석
충청남도18석-----4석22석
충청북도9석----1석3석13석
전라남도29석---1석-2석32석
전라북도18석1석----5석24석
경상남도30석1석1석---8석40석
경상북도27석1석----10석38석
제주특별자치도1석--1석--1석3석



이번 선거는 4·19 혁명 이후 자유롭고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13개 선거구에서 부정이 적발되어 재선거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혁신 세력은 진보당 사건 이후 잠잠했다가 4·19 혁명 이후 정치 전면에 등장하여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을 결성하여 선거에 도전했지만, 준비 기간이 짧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3. 2. 참의원 선거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의 참의원 선거는 84.1%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총 투표자 수는 9,747,688명이었다.

정당별 당선자 수는 다음과 같다.

정당별 당선자 수 (명)
정당의원수
민주당31
자유당4
사회대중당1
한국사회당1
혁신동지총연맹1
무소속20
합계58



지역별 정당별 당선자 수는 다음과 같다.

지역민주당자유당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혁신동지총연맹무소속합계
서울특별시4----26
경기도21---36
강원도3----14
충청남도211--26
충청북도31----4
전라남도41---38
전라북도4----26
경상남도4---138
경상북도3--1-48
제주특별자치도1----12



4.19 혁명 이후 자유당이 붕괴되고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지만,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무소속 당선자 상당수는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국회 개원과 동시에 대부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혁신 세력은 진보당 사건 이후 4.19 혁명을 거치며 정치 전면에 등장하여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을 결성하여 선거에 참여했지만, 짧은 준비 기간으로 인해 참의원에서는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3. 3. 정당별 득표율

민의원과 참의원의 정당별 득표수 및 득표율
정당민의원참의원
득표수득표율 (%)득표수득표율 (%)
민주당3,786,40141.78,195,54339.0
사회대중당541,0216.0516,3462.5
자유당249,9602.71,248,7535.9
한국사회당57,9650.6191,6430.9
통일당17,2930.2--
한국독립당26,6490.328,4360.1
기타149,3661.6476,1222.3
무소속4,249,18046.810,349,76349.3
합계9,077,835100.021,006,606-



참의원은 한 명의 유권자가 복수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는 제한연기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득표수의 합계는 선거인수를 상회하고 있다.[2]

4. 주요 정당 및 정치 세력

4·19 혁명 이후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의 주요 정당 및 정치 세력은 다음과 같다.


  • 민주당은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에서 모두 압승을 거두었다. 민의원 선거에서는 전체 의석의 75.1%인 175석을, 참의원 선거에서는 58석 중 31석을 차지하여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1] 무소속 당선자 중 상당수도 민주당 공천 탈락자였기에, 사실상 민주당의 완승이었다.

  • 자유당은 민의원 2석, 참의원 4석 확보에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1]

  •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 혁신 정당들은 4.19 혁명 이후 주요 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선거 결과는 사실상 전멸에 가까웠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회주의 혁신/진보 세력에 대해 여전히 이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12]


정당득표수득표율
민주당8,195,54338.9%
자유당1,248,7535.9%
사회대중당516,3462.4%
한국사회당191,6430.9%
혁신동지총연맹188,7920.9%
무소속10,349,76349.1%


4. 1. 민주당

민의원 선거 결과 민주당은 의원 정수의 75.1%에 해당하는 175석을 확보하여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무소속 당선자도 49명이었으나,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당 신·구파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들이었으므로, 민주당이 완승한 선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의원 정수 58명 중 31명을 당선시켜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했다.[1]

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 명단
지역지역구이름비고
서울특별시종로구윤보선
종로구한근조
중구주요한
중구정일형
용산구갑장면
용산구을김원만
성동구갑유성권
성동구을홍용준
동대문구민관식
동대문구이영준
성북구서범석
서대문구김도연
서대문구김산
마포구김상돈
서울특별시영등포구윤명운
영등포구무소속 김석원 당선
경기도인천시갑김재곤
인천시을곽상훈
인천시병김훈
경기도수원시홍길선
고양군무소속 류광렬 당선
광주군무소속 신하균 당선
양주군강영훈
양주군강승구
연천군허혁
포천군김영구
가평군홍익표
양평군천세기
여주군박주운
이천군무소속 최하영 당선
용인군김윤식
안성군무소속 김갑수 당선
평택군이병헌
화성군갑무소속 박상묵 당선
화성군을무소속 서태원 당선
시흥군무소속 이재영 당선
부천군무소속 박재환 당선
김포군무소속 정준 당선
경기도강화군무소속 윤재근 당선
파주군황인원
경기도옹진군무소속 손치호 당선
강원도춘천시계광순
원주시박충모
강릉시김명윤
강원도춘성군무소속 이찬우 당선
홍천군무소속 이재학 당선
횡성군양덕인
원성군사회대중당 윤길중 당선
영월군태완선
평창군무소속 장춘근 당선
정선군신인우
철원군무소속 황학성 당선
김화군무소속 신기복 당선
화천군김준섭
양구군김재순
인제군자유당 전형산 당선
고성군무소속 김응조 당선
강원도양양군함종윤
명주군무소속 최준길 당선
삼척군최경식
강원도울진군김광준
충청북도청주시이민우
충주시김기철
충청북도청원군신정호
청원군김창수
보은군박기종
옥천군신각휴
영동군민장식
진천군이충환
괴산군무소속 안동준 당선
음성군무소속 이정석 당선
중원군무소속 정상희 당선
제천군이태용
충청북도단양군헌정동지회 조종호 당선
충청남도대전시유진령
대전시진흥하
충청남도대덕군무소속 박병배 당선
연기군성태경
공주군갑무소속 박충식 당선
공주군을김학준
논산군갑김천수
논산군을윤담
부여군이석기
부여군이종순
서천군우희창
보령군김영선
청양군이상철
홍성군무소속 김영환 당선
예산군성원경
서산군갑무소속 장경순 당선
충청남도서산군을안만복
당진군갑이규영
당진군을박준선
아산군성기선
충청남도천안군갑홍춘식
천안군을이상돈
전라북도전주시유청
전주시이철승
군산시김판술
전라북도익산시이춘기
완주군이정원
완주군배성기
진안군무소속 전휘상 당선
금산군류진산
무주군신현돈
장수군무소속 송영선 당선
임실군무소속 한상준 당선
남원군사회대중당 박환생 당선
남원군윤정구
순창군홍영기
정읍군갑나용균
정읍군을무소속 송능운 당선
고창군류진
고창군무소속 김상흠 당선
부안군송일상
김제군갑조한백
김제군을윤제술
옥구군양일동
전라북도익산군조규완
익산군무소속 윤택중 당선
전라남도광주시정성태
광주시김용환
광주시이필선
전라남도목포시김문옥
여수시정재완
순천시윤형남
광산군고몽유
담양군김동호
곡성군윤주섭
구례군고기봉
광양군김석주
여천군김우평
승주군조연하
고흥군박형근
고흥군무소속 서민호 당선
보성군이정래
화순군박민기
장흥군고영완
강진군양병일
해남군무소속 홍광표 당선
해남군김채용
영암군통일당 김준연 당선
무안군김옥형
무안군유억우
전라남도무안군주도윤
나주군갑정문채
나주군을이경
함평군김의택
영광군조영규
전라남도장성군김병수
완도군김선태
진도군박희수
경상북도대구시갑서동진
대구시을사회대중당 서상일 당선
대구시병임문석
경상북도대구시정조재천
대구시무조일환
대구시기장영모
포항시이상면
김천시무소속 김세영 당선
경주시오정국
달성군박준규
군위군문명호
의성군오상직
의성군우홍규
안동군갑무소속 김시현 당선
안동군을박해충
청송군심길섭
영양군무소속 박종길 당선
영덕군김영수
경상북도영일군최태능
영일군최해용
월성군갑무소속 김종해 당선
월성군을황한수
영천군조헌수
영천군권중돈
경산군박해정
청도군김준태
고령군곽태진
성주군주병환
칠곡군무소속 장택상 당선
김녕군무소속 우돈규 당선
경상북도선산군무소속 신준원 당선
상주군갑홍정표
상주군을무소속 김기령 당선
문경군이병하
예천군현석호
경상북도영주군황호영
봉화군무소속 최영두 당선
경상북도울릉군무소속 전석봉 당선
경상남도부산시중구김응주
부산시서구김영삼
부산시서구김동욱
부산시영도구최성욱
경상남도부산시영도구이만우
부산시동구박순천
부산시동구이종린
부산시부산진구이종남
부산시부산진구박찬현
부산시동래구김명수
마산시정남규
진주시김용진
충무시최천
진해시김병진
삼천포시무소속 이재현 당선
진양군황남팔
의령군강봉룡
함안군한종건
창녕군박기정
경상남도밀양군갑백남훈
밀양군을사회대중당 박권희 당선
양산군무소속 임기대 당선
울산군갑최영근
울산군을무소속 정해영 당선
동래군조일재
김해군최원호
김해군무소속 서정원 당선
창원군이양호
창원군무소속 김봉재 당선
통영군서정귀
거제군윤병한
경상남도고성군자유당 최석림 당선
사천군정헌주
남해군무소속 최치환 당선
하동군무소속 윤종수 당선
산청군조명환
함양군정준현
거창군신중하
합천군무소속 이상신 당선
경상남도합천군정길영
제주도제주시고잠룡
제주도북제주군무소속 홍문중 당선
남제주군한국사회당 김성숙 당선



정당득표수득표율
민주당8,195,54338.9%
자유당1,248,7535.9%
사회대중당516,3462.4%
한국사회당191,6430.9%
혁신동지총연맹188,7920.9%
무소속10,349,76349.1%


4. 2. 자유당

자유당은 민의원 선거에서 2석, 참의원 선거에서 4석을 얻는 데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1]

득표수득표율
1,248,7535.9%


4. 3. 혁신계 정당

선거 결과는 자유당뿐만 아니라 4.19 이후 주요 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되던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 혁신 정당들도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드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념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대중당이 5월 중순 창당을 선언하며 "(자유당 대 민주당의) 보수 양당 제도를 거부 배격하고 보수 대 혁신 양당 제도의 조속한 확립을 위하여 탈투할 것"이라고 사뭇 자신 있게 선언한 것에 비하면, 사회주의 혁신/진보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이질감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12]

정당득표수득표율
사회대중당516,3462.4%
한국사회당191,6430.9%
혁신동지총연맹188,7920.9%


5. 제2공화국 정부 구성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된 후,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의원참의원이 구성되었다. 이 선거는 1952년 헌법 개정으로 참의원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참의원 선거였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1960년 8월 8일 국회 개원식 및 의장 선거


총선 이후 8월 12일,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당 구파[3]윤보선 의원이 208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4][5]

대통령 선거
후보자별 득표수
당락후보자득표수%
당선윤보선20882.2
김창숙2911.5
변영태31.2
허정20.8
김도연20.8



이후, 윤보선 대통령은 민주당 신파[6]장면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면 총리의 내각 구성이 신파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민주당 내 신구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구파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1960년 10월 18일에 신민당을 창당했다.

5. 1. 장면 내각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한국 정치 지형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민주당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당내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대통령은 양원 합동 회의에서 재적 의원 3분의 2의 득표로 선출되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민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

선거 직후 민주당 구파는 분당을 선언했고, 대통령 및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신파와 구파는 충돌했다. 구파는 양원 의장단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며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차지하려 했다. 신파는 국정 안정을 위해 대통령직은 구파에 양보하고,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직을 차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구파는 8월 11일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김도연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신파도 8월 12일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8월 12일, 윤보선은 양원 합동 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8월 16일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신파와 무소속 의원들의 반대로 8월 17일 민의원 투표에서 부결되었다.[13]

윤보선 대통령은 8월 18일 장면을 국무총리로 지명했고, 8월 19일 민의원 투표에서 찬성 117표, 반대 107표로 가까스로 인준을 통과시켰다.

1960년 8월 23일, 장면 총리는 조각을 완료하고 초대 내각을 발표했다. 그러나 내각 명단은 대부분 신파 인사들로 채워져 구파의 반발을 샀다.[14] 13명의 장관 중 정헌주 (교통장관), 박제환 (농림장관), 오천석 (문교장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파 의원들이었다.

장면 총리는 9월 12일 개각을 통해 국방장관, 교통장관, 체신장관, 보사장관, 부흥장관 등을 구파 인사들로 교체했다.[15] 그러나 신구파 간 갈등은 계속되어 장면 내각의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했다.

6. 의의와 한계

1961년 5월 13일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을 포함한 5명이 당선되었으나, 3일 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임기는 3일 뿐이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국회의원의 최단 임기이다.[7] 김대중을 제외한 4명은 이후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이 없다.[7]

7.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Unspecified) 2001
[2] 서적 現代韓国と女性 新幹社 (Unspecified)
[3] 문서 (Unspecified)
[4] 서적 韓国政治の研究 三一書房 (Unspecified)
[5] 서적 韓国現代政治 東京大学出版会 (Unspecified)
[6] 문서 (Unspecified)
[7] 웹사이트 의회정치 60년, 선량들이 낳은 진기록|신동아 https://shindonga.do[...] 2008-08-04
[8] 웹인용 "보수 양당을 강조" 유 의원, 혁신 쇠퇴를 이유로 https://newslibrary.[...] 1960-08-02
[9] 웹인용 창당 이래 신·구 항시 이견... 민주당의 분당, 반독재 투쟁 5년 1개월만에 https://newslibrary.[...] 1960-12-26
[10] 법률 대한민국헌법 http://www.law.go.kr[...] 1960-06-15
[11] 법률 국회의원선거법 http://www.law.go.kr[...] 1960-06-23
[12] 웹인용 "보수 혁신 양당제를 지향" 사대당, 발기취지문 발표 https://newslibrary.[...] 1960-05-13
[13]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1960-08-17
[14] 웹인용 장면 총리 조각을 완료, 거의가 신파 일색으로 https://newslibrary.[...] 1960-08-24
[15]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사상사 2004-09-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