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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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4·19 혁명 이후 의원내각제 헌법에 따라 치러진 1960년 7월 29일의 선거이다. 민의원과 참의원을 선출하는 양원제로 실시되었으며, 선거권 연령이 만 20세로 낮아졌다. 선거 결과,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민의원에서는 175석, 참의원에서는 31석을 확보했다. 자유당은 몰락하여 소수의 의석만을 얻었고, 혁신계 정당들은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선거 후 민주당 내 신·구파 갈등으로 인해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나 내각 구성 과정에서 갈등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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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
---|---|
지도 | |
![]() | |
기본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이전 선거 | 1958년 |
선거일 | 1960년 6월 29일 |
다음 선거 | 1963년 |
민의원 선거 | |
선거 이름 | 민의원 |
투표율 | 84.35% ( 3.45%p) |
선출 의석 수 | 민의원 전체 233석 |
과반 의석 수 | 117석 |
민의원 선거 결과 | |
정당 | 민주당 |
정당 지도자 | 장면 |
득표율 | 41.71% |
이전 선거 의석 수 | 79석 |
당선 의석 수 | 175석 |
정당 | 사회대중당 |
정당 지도자 | 서상일 |
득표율 | 5.96%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4석 |
정당 | 자유당 |
정당 지도자 | 조경규 |
득표율 | 2.75% |
이전 선거 의석 수 | 126석 |
당선 의석 수 | 2석 |
정당 | 한국사회당 |
득표율 | 0.64%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1석 |
정당 | 통일당 |
득표율 | 0.19% |
이전 선거 의석 수 | 0석 |
당선 의석 수 | 1석 |
정당 | 기타 정당 |
정당 지도자 | – |
득표율 | 1.65% |
이전 선거 의석 수 | 0석 |
당선 의석 수 | 1석 |
정당 | 무소속 |
정당 지도자 | – |
득표율 | 46.81% |
이전 선거 의석 수 | 27석 |
당선 의석 수 | 49석 |
민의원 의장 | |
선거 전 의장 | 곽상훈 |
선거 전 의장 소속 정당 | 민주당 |
선거 후 의장 | 곽상훈 |
선거 후 의장 소속 정당 | 민주당 |
참의원 선거 | |
선거 이름 | 참의원 |
선출 의석 수 | 참의원 전체 58석 |
과반 의석 수 | 30석 |
참의원 선거 결과 | |
정당 | 민주당 |
정당 지도자 | 장면 |
득표율 | 51.41%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31석 |
정당 | 자유당 |
정당 지도자 | 조경규 |
득표율 | 6.12%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4석 |
정당 | 사회대중당 |
정당 지도자 | 서상일 |
득표율 | 1.37%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1석 |
정당 | 한국사회당 |
득표율 | 1.27%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1석 |
정당 | 기타 |
정당 지도자 | – |
득표율 | 1.77%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1석 |
정당 | 무소속 |
정당 지도자 | – |
득표율 | 38.07% |
이전 선거 의석 수 | 신생 |
당선 의석 수 | 20석 |
2. 배경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참의원은 1952년 7월 헌법 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실제 선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였다.
2. 1. 4.19 혁명과 개헌
4·19 혁명 이후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 헌법이 공포되었고, 10일 뒤인 6월 25일 개정·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7월 29일 민의원의원과 참의원의원의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10] 이 선거는 헌법을 개정하여 정부의 구성 방식을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변경한 후, 제2공화국을 담당할 정부를 선택하는 최초의 선거였기 때문에 국내·외의 관심을 받았다.[10]양원제인 참의원은 1952년부터 헌법에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 기간에는 집권당인 자유당의 거부로 의원 선거 자체가 실시되지 못하고, 국회는 사실상 민의원 단독의 단원제로 운영되었다.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물러난 후,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로의 헌법 개정이 시행된 후,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참고로, 참의원은 이승만 시대인 1952년 7월 헌법 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고, 이번이 처음으로 치러지는 선거였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 모두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었다.
2. 2. 선거 제도
1952년부터 헌법에 양원제가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 기간에는 집권당인 자유당의 거부로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국회는 사실상 민의원 단독의 단원제로 운영되었다.[11]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제5대 총선에서 처음 실시된 참의원 선거는 서울특별시와 각 도(道)를 선거구로 한 대선거구제로 실시되었다. 참의원의 선거구별 의원 정수는 전라남도, 경상남도, 경상북도가 각 8명, 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가 각 6명, 강원도, 충청북도가 각 4명, 제주도는 2명이었다. 투표는 하나의 투표용지에 1명에게만 기표하는 단기명 투표가 아니라, 선거구별 당선 정원의 2분의 1까지 기표할 수 있는 제한 연기명 투표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예를 들어 한 선거구에서 6명의 참의원의원이 선출될 경우, 그 선거구의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기재된 후보자 중 3명까지 기표할 수 있었다.[11]
민의원의원 선거는 종전과 같이 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투표 방법은 먼저 민의원의원에 투표하고, 그 다음 참의원의원에 투표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었다.
이번 선거부터 선거권 연령이 만 21세에서 만 20세로 낮아졌다.
2. 3. 정당 상황
민주당은 집권당으로 확정적이었으나, 233개 선거구 가운데 민의원의원에 227명, 참의원의원에 58명을 공천하려 했다. 그러나 신파와 구파 간의 경쟁이 치열하여 신파 공천 선거구에 구파가, 구파 공천 선거구에 신파가 대항 후보를 내는 곳이 110여 곳이나 되었다.[1]몰락하던 자유당은 공식적인 공천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자유당으로 출마한 사람은 민의원의원이 54명, 참의원의원이 11명이었다.[1]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민주당을 비롯하여 14개 정당·사회단체가 후보를 냈고, 무소속은 입후보자 총수의 64.4%에 해당하는 1,010명으로 4·19혁명 직후의 정치 과열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모두 305명이 입후보하여 전체의 19.55%를 차지했다.[1]
3. 선거 결과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된 후, 1960년 7월 29일에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참의원은 1952년 헌법 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실제 선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번 선거부터 선거권 연령이 만 21세에서 만 20세로 낮아졌다.
주요 정보
-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 국무총리
- 의석 수
- 민의원: 233석
- 참의원: 58석
- 선거 제도
- 민의원: 소선거구제
- 참의원: 서울특별시와 도를 선거구 단위로 한 대선거구제(제한연기제)
- 입후보자 수
- 민의원: 1,563명
- 참의원: 201명
- 선거 인구: 11,593,432명
- '''투표일''':1960년 7월 29일
- '''투표율''':84.3%
자유당이 사실상 붕괴하고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군소정당이 난립하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였지만,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무소속 당선자 상당수는 민주당 후보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국회 개원과 동시에 민주당에 입당했다. 13개 선거구에서 부정이 적발되어 재선거가 실시되었지만, 대체로 자유롭고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진보당 사건 이후 잠잠했던 혁신 세력은 4·19 혁명 이후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을 결성하여 선거에 참여했지만, 준비 기간이 짧아 민의원 5석, 참의원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3. 1. 민의원 선거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중 민의원 선거는 자유당이 사실상 붕괴되고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여러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하지만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총 투표율은 84.3%였으며, 총 투표자 수는 9,778,921명이었다.민주당은 총 175석을 획득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사회대중당은 4석, 자유당은 2석, 한국사회당은 1석, 통일당은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무소속 당선자는 49명이었으나,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인사들로, 국회 개원과 함께 대부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정당별 당선자 수
지역별 당선자 수
지역 | 민주당 | 사회대중당 | 자유당 | 한국사회당 | 통일당 | 헌정동지회 | 무소속 | 합계 |
---|---|---|---|---|---|---|---|---|
서울특별시 | 15석 | - | - | - | - | - | 1석 | 16석 |
경기도 | 14석 | - | - | - | - | - | 11석 | 25석 |
강원도 | 11석 | 1석 | 1석 | - | - | - | 7석 | 20석 |
충청남도 | 18석 | - | - | - | - | - | 4석 | 22석 |
충청북도 | 9석 | - | - | - | - | 1석 | 3석 | 13석 |
전라남도 | 29석 | - | - | - | 1석 | - | 2석 | 32석 |
전라북도 | 18석 | 1석 | - | - | - | - | 5석 | 24석 |
경상남도 | 30석 | 1석 | 1석 | - | - | - | 8석 | 40석 |
경상북도 | 27석 | 1석 | - | - | - | - | 10석 | 38석 |
제주특별자치도 | 1석 | - | - | 1석 | - | - | 1석 | 3석 |
이번 선거는 4·19 혁명 이후 자유롭고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13개 선거구에서 부정이 적발되어 재선거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혁신 세력은 진보당 사건 이후 잠잠했다가 4·19 혁명 이후 정치 전면에 등장하여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을 결성하여 선거에 도전했지만, 준비 기간이 짧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3. 2. 참의원 선거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의 참의원 선거는 84.1%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총 투표자 수는 9,747,688명이었다.정당별 당선자 수는 다음과 같다.
지역별 정당별 당선자 수는 다음과 같다.
지역 | 민주당 | 자유당 | 사회대중당 | 한국사회당 | 혁신동지총연맹 | 무소속 | 합계 |
---|---|---|---|---|---|---|---|
서울특별시 | 4 | - | - | - | - | 2 | 6 |
경기도 | 2 | 1 | - | - | - | 3 | 6 |
강원도 | 3 | - | - | - | - | 1 | 4 |
충청남도 | 2 | 1 | 1 | - | - | 2 | 6 |
충청북도 | 3 | 1 | - | - | - | - | 4 |
전라남도 | 4 | 1 | - | - | - | 3 | 8 |
전라북도 | 4 | - | - | - | - | 2 | 6 |
경상남도 | 4 | - | - | - | 1 | 3 | 8 |
경상북도 | 3 | - | - | 1 | - | 4 | 8 |
제주특별자치도 | 1 | - | - | - | - | 1 | 2 |
4.19 혁명 이후 자유당이 붕괴되고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지만,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무소속 당선자 상당수는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국회 개원과 동시에 대부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혁신 세력은 진보당 사건 이후 4.19 혁명을 거치며 정치 전면에 등장하여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을 결성하여 선거에 참여했지만, 짧은 준비 기간으로 인해 참의원에서는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3. 3. 정당별 득표율
정당 | 민의원 | 참의원 | ||
---|---|---|---|---|
득표수 | 득표율 (%) | 득표수 | 득표율 (%) | |
민주당 | 3,786,401 | 41.7 | 8,195,543 | 39.0 |
사회대중당 | 541,021 | 6.0 | 516,346 | 2.5 |
자유당 | 249,960 | 2.7 | 1,248,753 | 5.9 |
한국사회당 | 57,965 | 0.6 | 191,643 | 0.9 |
통일당 | 17,293 | 0.2 | - | - |
한국독립당 | 26,649 | 0.3 | 28,436 | 0.1 |
기타 | 149,366 | 1.6 | 476,122 | 2.3 |
무소속 | 4,249,180 | 46.8 | 10,349,763 | 49.3 |
합계 | 9,077,835 | 100.0 | 21,006,606 | - |
참의원은 한 명의 유권자가 복수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는 제한연기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득표수의 합계는 선거인수를 상회하고 있다.[2]
4. 주요 정당 및 정치 세력
4·19 혁명 이후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의 주요 정당 및 정치 세력은 다음과 같다.
- 민주당은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에서 모두 압승을 거두었다. 민의원 선거에서는 전체 의석의 75.1%인 175석을, 참의원 선거에서는 58석 중 31석을 차지하여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1] 무소속 당선자 중 상당수도 민주당 공천 탈락자였기에, 사실상 민주당의 완승이었다.
- 자유당은 민의원 2석, 참의원 4석 확보에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1]
-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 혁신 정당들은 4.19 혁명 이후 주요 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선거 결과는 사실상 전멸에 가까웠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회주의 혁신/진보 세력에 대해 여전히 이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12]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민주당 | 8,195,543 | 38.9% |
자유당 | 1,248,753 | 5.9% |
사회대중당 | 516,346 | 2.4% |
한국사회당 | 191,643 | 0.9% |
혁신동지총연맹 | 188,792 | 0.9% |
무소속 | 10,349,763 | 49.1% |
4. 1. 민주당
민의원 선거 결과 민주당은 의원 정수의 75.1%에 해당하는 175석을 확보하여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무소속 당선자도 49명이었으나,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당 신·구파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들이었으므로, 민주당이 완승한 선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의원 정수 58명 중 31명을 당선시켜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했다.[1]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민주당 | 8,195,543 | 38.9% |
자유당 | 1,248,753 | 5.9% |
사회대중당 | 516,346 | 2.4% |
한국사회당 | 191,643 | 0.9% |
혁신동지총연맹 | 188,792 | 0.9% |
무소속 | 10,349,763 | 49.1% |
4. 2. 자유당
자유당은 민의원 선거에서 2석, 참의원 선거에서 4석을 얻는 데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1]득표수 | 득표율 |
---|---|
1,248,753 | 5.9% |
4. 3. 혁신계 정당
선거 결과는 자유당뿐만 아니라 4.19 이후 주요 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되던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 혁신 정당들도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드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념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대중당이 5월 중순 창당을 선언하며 "(자유당 대 민주당의) 보수 양당 제도를 거부 배격하고 보수 대 혁신 양당 제도의 조속한 확립을 위하여 탈투할 것"이라고 사뭇 자신 있게 선언한 것에 비하면, 사회주의 혁신/진보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이질감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12]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사회대중당 | 516,346 | 2.4% |
한국사회당 | 191,643 | 0.9% |
혁신동지총연맹 | 188,792 | 0.9% |
5. 제2공화국 정부 구성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된 후,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의원과 참의원이 구성되었다. 이 선거는 1952년 헌법 개정으로 참의원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참의원 선거였다. 선거 결과,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총선 이후 8월 12일,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당 구파[3]의 윤보선 의원이 208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4][5]
이후, 윤보선 대통령은 민주당 신파[6]의 장면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면 총리의 내각 구성이 신파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민주당 내 신구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구파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1960년 10월 18일에 신민당을 창당했다.
5. 1. 장면 내각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한국 정치 지형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민주당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당내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대통령은 양원 합동 회의에서 재적 의원 3분의 2의 득표로 선출되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민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
선거 직후 민주당 구파는 분당을 선언했고, 대통령 및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신파와 구파는 충돌했다. 구파는 양원 의장단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며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차지하려 했다. 신파는 국정 안정을 위해 대통령직은 구파에 양보하고,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직을 차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구파는 8월 11일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김도연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신파도 8월 12일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8월 12일, 윤보선은 양원 합동 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8월 16일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신파와 무소속 의원들의 반대로 8월 17일 민의원 투표에서 부결되었다.[13]
윤보선 대통령은 8월 18일 장면을 국무총리로 지명했고, 8월 19일 민의원 투표에서 찬성 117표, 반대 107표로 가까스로 인준을 통과시켰다.
1960년 8월 23일, 장면 총리는 조각을 완료하고 초대 내각을 발표했다. 그러나 내각 명단은 대부분 신파 인사들로 채워져 구파의 반발을 샀다.[14] 13명의 장관 중 정헌주 (교통장관), 박제환 (농림장관), 오천석 (문교장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파 의원들이었다.
장면 총리는 9월 12일 개각을 통해 국방장관, 교통장관, 체신장관, 보사장관, 부흥장관 등을 구파 인사들로 교체했다.[15] 그러나 신구파 간 갈등은 계속되어 장면 내각의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했다.
6. 의의와 한계
1961년 5월 13일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을 포함한 5명이 당선되었으나, 3일 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임기는 3일 뿐이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국회의원의 최단 임기이다.[7] 김대중을 제외한 4명은 이후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이 없다.[7]
7. 같이 보기
- 대한민국 국회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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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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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2]
서적
現代韓国と女性
新幹社
(Unspec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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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Unspec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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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韓国政治の研究
三一書房
(Unspec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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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韓国現代政治
東京大学出版会
(Unspecified)
[6]
문서
(Unspec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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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의회정치 60년, 선량들이 낳은 진기록|신동아
https://shindonga.do[...]
2008-08-04
[8]
웹인용
"보수 양당을 강조" 유 의원, 혁신 쇠퇴를 이유로
https://newslibrary.[...]
1960-08-02
[9]
웹인용
창당 이래 신·구 항시 이견... 민주당의 분당, 반독재 투쟁 5년 1개월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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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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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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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06-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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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06-2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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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혁신 양당제를 지향" 사대당, 발기취지문 발표
https://newslibrary.[...]
1960-05-13
[13]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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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08-17
[14]
웹인용
장면 총리 조각을 완료, 거의가 신파 일색으로
https://newslibrary.[...]
1960-08-24
[15]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사상사
200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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